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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イテム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
http://hdl.handle.net/10112/6144
http://hdl.handle.net/10112/6144fa9d756c-bea6-4552-b981-3d53de1c16eb
名前 / ファイル | ライセンス | アクショ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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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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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ype | 一般雑誌記事 / Article(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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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開日 | 2012-02-22 | |||||
タイトル | ||||||
タイトル |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정비와 운영 | |||||
言語 | ||||||
言語 | kor | |||||
資源タイプ | ||||||
資源タイプ識別子 | http://purl.org/coar/resource_type/c_6501 | |||||
資源タイプ | article | |||||
著者 |
한, 형주
× 한, 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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概要 | ||||||
内容記述タイプ | Other | |||||
内容記述 | 조선시대의 왕릉은 풍수지리학과 미술사 등에서 왕릉연구가 이루어졌을 뿐 그것 의 국가의례 측면에서의 접근이 거의 없었다. 본고에서는 이중에서 제례를 대상으로 초기 왕릉제사의 제도적 정비와 의식, 종묘와 차별성, 그리고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 등을 천착함으로써 국가의례에서 왕릉이 차지하는 위치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왕릉은 태조 즉위 후 추존된 4 대왕 및 왕비 그리고 신의왕후의 齊陵이 조성되 었고 능제의 정비는 친모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일에 태종의 행행이 거행되면서 이 루어졌는데, 특히 태종 8 년 태조의 사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厚陵과 獻陵이 조 성된 세종대에는 제사와 관련된 여러 세부 사항들과 拜陵儀가 수정. 보완되었다. 그 내용은 세종 사후『세종실록』오례의 왕릉과 관련된 흉례조와 길례조에 수록되었으 며, 이후 부분적 수정을 통해『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왕릉에서 시행된 제사는 四孟月의 시제와 朔望, 俗節 등 다양한데, 이것은 당시 종묘 및 원묘인 문소전에서 시행된 것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이래의 전 통으로 보이는데, 중국사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능제 는 국가 祀典의 大祀에 편입된 고려시대와 달리 大・中・小祀의 편재가 아닌 俗祭라 는 별도의 체계에 속함으로써 大祀로 국가의 正禮인 종묘와는 구분되었다. 아울러 능제를 흉례의 체계에 附加시킨 중국과 달리 왕릉 관련 의식을 흉례와 길례로 구분 하여 각각에 편입시키는 독자성을 보였다. 태조 ~ 성종의 100년간 종묘의 국왕친제가 41회에 불과한 반면 왕릉과 원묘(문소 전)에 대해서는 국왕이 매년 2 ~ 5 회에 걸쳐 행행했다. 그 후 문소전은 임진왜란 과정에서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지 않았고, 왕릉의 사시제는 인조대에 이르러 폐지되 기에 이르렀다. 이후 왕릉제사는 속절제(臘日 제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사에 왕의 참여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대표적인 제사대상인 종묘의 경우에도 대략 2 ~ 3 년에 한번씩 왕이 친행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왕릉의 친제는 매년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대의 선왕이 모여 있는 혼전보다는 육신 이 안치된 개별 능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꼈고, 능제가 俗祭이기 때문에 제사과정 이 간략하다는 측면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장엄한 의장을 갖춘 능행은 도성 을 벗어나 일반 민에게 우리의 ‘왕’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정치행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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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誌情報 |
周縁の文化交渉学シリーズ3 『陵墓からみた東アジア諸国の位相―朝鮮王陵とその周縁』 p. 45-61, 発行日 2011-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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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
識別子タイプ | ISBN | |||||
関連識別子 | 978-4-9905164-6-8 | |||||
出版者 | ||||||
出版者 | 関西大学文化交渉学教育研究拠点(ICIS) | |||||
シリーズ | ||||||
関連名称 | Vol.3 |